광명시민들 대부분은 영회원(永懷園)은 몰라도 애기능이라 부르는 곳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영회원이 애기능과 같은 곳을 일컫는 지명이라는 것을 아는 시민 또한 별로 많지 않다.
영회원은 조선의 16대 왕 인조의 첫째아들이자 권력투쟁의 희생물이었던 소현세자의 비 민회빈 강씨의 묘이자 광명유일의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민회빈 강씨는 금천 강씨로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 장군의 20세손이다.
1611년 중추부영사였고 후에 우의정에 오른 강석기의 5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나 1627년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상황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반정공신들이, 당파적 이익 차원에서 국혼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국혼물실(國婚勿失) 정책에 따라 서인 가문과 혼례를 밀어붙인 결과였다.
본래 민회빈 강씨는 세자빈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가 간택되기 2년 전, 소현세자는 파평 윤씨 가문의 여성과 혼인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성은 이괄의 난에 가담한 윤인발과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파혼당해 내쳐지게 되었다. 이후 소현세자의 혼례가 무산된 지 2년 만에 서인이었던 참의 강석기의 딸 민회빈 강씨가 다시 간택된 것이라 알려지고 있다.
이후 민회빈 강씨는 소현세자와 사이에 병자호란이 나던 1636년 원손인 이석철을 낳는 등 석린,석견의 3남 3녀를 두었다.
국가사적 제 357호로 지정되어 있는 민회빈 강씨의 묘 영회원 주변은 아버지 강석기의 묘 등 금천 강씨 집안의 29기 분묘가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묘들을 살펴보면 비석이 뽑혀져 나간 비석들이 많은데, 민회빈 강씨가 폐서인되면서 폐족으로 몰린 금천 강씨의 묘에 있는 비석을 뽑아 버리고 비에 새겨져 있는 글들을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또 금천 강씨 선영 주변의 묘를 보면 기존의 비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비석들이 있다.
이처럼 금천 강씨 선영은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부분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현재 경기도문화재로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민회빈 강씨의 고향이 이곳 광명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할 것이다.
민회빈 강씨의 고향인 광명시 학온동 산141-20번지에 있는 영회원은 인조로부터 폐위된 민회빈 강씨가 묻힌 곳으로, 처음에는 애기릉으로 불리우다 1718년(숙종 44) 강씨가 복위되어 민회원으로 불리었고, 이후 1903년(고종 40) 영회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애기능이라 불리었던 이유는 친정집에서 어린 나이에 시집간 강빈을 '애기씨'라 불렀으며, 폐서인 되어 서민으로 묻힌 강씨의 무덤을 다르게 부를 이름도 없었을 뿐더러, 안쓰럽고 안타까워 '애기능'이라 이름 지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돌아온지 2개월만인 1645년(인조 23) 4월 26일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병사를 하였다. 당시 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독살이라는 소문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인조와 강빈의 갈등은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고 1646년 2월 29일, 인조는 강빈의 형제인 강문성과 강문명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3월 15일에는 강빈을 사가로 내쫓은 다음 사약을 내렸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의 번영을 꿈꾸던 강빈은 죽임을 당한 뒤 남편 소현세자가 잠들은 소경원(昭慶園)과 떨어져 강씨 문중의 선산에 묻혔다.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昭慶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