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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시대의 선구자였던 비운의 여인 민회빈 강씨!(3)

위기에서 찾은 CEO정신과 애민사상!

급변하는 중국 정세를 잘 읽고 현실적인 대청외교로 기존의 중국과 군신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외교를 펼치려던 광해군과 달리,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은 자신들의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친명배청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강홍립 장군 항복 사건


이처럼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에 둔감, 시대적 흐름의 대세를 읽지 못한 서인정권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아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항복으로 회자되는 삼전도 굴욕당하게 된다. 즉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구)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의 항복 예()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삼전도비(공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


명과 중원을 놓고 다투던 중국의 신흥강자 청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배청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이 명을 치는데 조선이 공격해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상황이 될 것을 염려하여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치욕스런 삼전도 굴욕으로 인조의 큰아들인 소현세자, 강빈, 봉림대군(훗날 효종), 3정승 6판서 자제, 그리고 궁녀.신하 등 192명의 인질과 50만명의 백성이 청에 끌려가게 된다.

그래서 강빈은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 된다.

60여일 만에 청의 심양관에 정착한 강빈은 세자빈이라는 체면을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여 인질로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야 된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어렵게 심양에서의 안살림을 꾸려가던 강빈에게 난국을 타개 할 기회가 찾아 왔으니, 인질 생활 2년 무렵 청 태조 누르하치의 열두번째 아들인 팔왕이 은밀히 은자500냥을 보내 조선의 면포, 표범가죽, 수달피 등을 원한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기회로 여긴 강빈은 첫 거래를 성사시킨 후 본격적인 무역에 나섰고, 그 결과 심양관은 재물이 쌓이고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강빈이 무역을 통해 재력을 쌓아가던 인조 19(1641), 즉 심양생활 5년째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으니 청나라에서 농사짓기를 권유해온 것이다. 심양관의 신하들은 농사를 짓게 되면 영원히 조선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노예시장에서 보았던 조선인(朝鮮人) 포로들의 참상(慘狀)을 잊지 않고 있던 강빈은 생각이 달랐다. 그동안 쌓아둔 재력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환속시켜 농사를 지으면 그들을 청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의 질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청나라로부터 야리강(野里江) 동남 왕부촌(王富村)과 노가촌(魯哥村) 두 곳에 각각 150일 갈이와 사하보(沙河堡) 근처의 150일 갈이, 사을고(士乙古) 근처 중 150일 갈이를 농토로 제공받았다. (하루갈이는 장정 한 명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의 농토)

처음에는 한인(漢人) 노예들과 소를 사서 농사를 지었으나 점차 한인 농군을 노예 시장에서 속환한 조선인으로 바꾸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조선인 농군들은 더욱 열심히 일을 했고 심양장계에 따르면 인조 20년에 농사로 거둔 곡식은 3,319석이나 됐다 한다. 하여 강빈이 벌어드린 돈으로 해방시킨 포로의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좌절에 신음하던 조선의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강빈은 조선의 농법이 가미된 이 농산물을 만주 귀족들에게 팔았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으로 매매되었다. 무역만 하던 단일체제에서 생산과 무역을 겸하는 복합체제로 발전한 것이다.


강빈의 경영수완 덕분에 인질 생활 초기 울며 호소하는 조선인들로 가득 찼던 심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고 인조실록’ 236월조에 보면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청은 명과의 전쟁에 조선의 파병을 자주 요청하였고, 인조의 명을 받은 조선군은 마지못해 싸우는 척만 하였다(임경업 장군 사보타주.평안감사 심문 사건 등). 이에 격분한 청은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심옥(瀋獄)을 벌였다.


그러나 강빈의 재력을 바탕으로 평소 청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고, 조선을 압박하던 이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소현세자는 진상조사단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심옥을 종결시켰다. 이렇듯 소현세자가 청과 조선의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역할을 하는데도 뛰어난 경영능력으로 자금을 마련한 강빈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일국의 세자빈으로 조선을 떠나 청에 인질로 끌려간 강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좌절하고 무력감에 빠졌겠지만 강빈은 인질 생활에 좌절하는 대신, 대규모 영농과 국제 무역을 주도하는 경영가로 변신했다.

또 포로로 끌려와 신음하는 조선의 백성들을 잊지 않고 그들을 죽음의 고비에서 구해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탁월한 선택이었으며, 강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강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00년 굴곡의 세월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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