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력 한장 고 희 숙 시간의 언덕길을 뜨겁게 올라 막바지 숨을 헐떡이며 묵묵히 서 있다. 송구영신을 출발 폭염으로 물든 추석까지 열한장의 흔적을 채웠더니 마지막 한장의 달력을 허락해준다. 산다는 것 잘 살아왔다는 것은 그냥 그대로의 지금 내 모습을 끌어안으며 견뎌온 순간을 포옹하고 오늘을 마주함이다. 순간으로 느껴지는 인생의 파노라마가 내일도 오늘처럼 상영되겠지만 깊어지는 굴곡만큼 더 많은 의미를 담아 또 한페이지를 써내려 가야겠다. 내일은 느낌표일까 물음표일까 기다림은 나를 설레게 한다.
복면가왕 고희숙 진실을 감춘 이미지는 또 다른 내가 내면에서 용트림 하고 알 수 없는 신의 힘을 쏟아낸다. 무대 위의 화려함에 얼굴 가린 낯선 이방인 시선은 한순간 비수처럼 꽂이고 내면을 헤집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애초에 내가 아닌 나는 또 다른 나를 찾아 마주하고 관객은 변신에 열광 하고 있다 마법 풀린 유리구두처럼 실체가 드러나면 신비로움은 사라지고 초라한 껍질만 덩그러니 남겠지만 내면의 진실은 가면 뒤에서 무한한 끼를 발산하며 인생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하루 고희숙 세월이란 거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옷을 갈아입었을까 힘겨운 하루의 잔재로 구겨진 옷을 어떤 날은 흥건히 배인 통증으로 적셔진 옷을 입은 채 녹이 슨 하루를 맞이하기도 호롱불 밑에서 희고 검은 실밥 징검다리 놓아 엄마가 만들어주신 옷 입고 깔깔거리던 그 시절 기억은 심지 속으로 사그라져 버리고 어떤 하루의 옷을 입어도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세월의 힘 앞에서 헤매나 보다 창가에 무더운 하루가 서성인다. 습관처럼 모자와 양산을 준비 해야겠다.
가로등을 퇴근 시키고 고희숙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을 흔들어 깨웠다. 새벽도 때론 늦잠을 자고 싶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내가 이렇게 새벽을 깨우는 이유는... 날마다 되풀이 되는 야간근무에 지친 가로등을 좀더 일찍 퇴근 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벽이 마지 못한 듯 하품을 하며 일어나 가로등을 퇴근 시킨다. 내게 고맙다고 목례를 하고 가로등이 귀가한 오솔길을 님 그리며 홀로 걷는다.
어떤 기대 기 호 신 똑같은 날 속에서 밝은 다른 날 알 수 없는 곳에서 뜨거움이 울며 솟아 오른 날이다. 하여 바닥에 흘린 눈물 마를 것 같은 날. 허공에 날려버린 꽃 너무 많아 담겨진 물음표 꺼내보는데 디디는 첫걸음에 진한 뜨거움이 녹아나는 날 이제 흐르다 막히고 붙었다 깨어진 시간 디딤돌 삼아 온전한 시간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수렁에서 건져 올린 꽃이 맑은 웃음으로 피어나 어제보다 나은 내일로 가는 오늘 마주잡은 포근한 손끝에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었다.
마음 냄비 고 희 숙 오늘은 찌그러진 냄비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 투덜거리며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니 어긋난 말투에 시커멓게 타버렸다. 싱크대에 잡념들을 담아 놓고 찌그러지고 타버린 냄비를 수없이 설거지하며 다짐해본다. 찌그러진 냄비 펴는 일보다 찌그러트리지 않음이 소중하다고
수많은 사연 전하더니 고 희 숙 어둠이 드리워진 밤하늘 사이로 별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반짝이는 저 별은 누구에게 전할 사연이 그리 많아 추운 밤 지새우며 속삭이나! 길게 꼬리를 드리우며 떨어지는 저 별은 그리움 지워진 마음의 소리를 간직하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나! 무심한 듯 변치 않는 저 별에 포근해진 마음하나 내려놓고 별을 타고 온 바람에 정갈하게 몸을 씻기 운다. 밤 세워 상심의 그늘 빛으로 채워 수많은 사연 전하더니 일상이 밀려오면 수많은 연서 간직한 채 부끄러운 듯 몸을 감춘다.
12월의 퍼즐 고희숙 퍼즐 한조각을 끼워 넣는 일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 남겨진 공간을 삼킬 듯 에워싼 팽팽한 균형 서로의 몸통을 조이거나 깎아 낸 열 한 개의 조각들이 마침내 접어 둔 비밀을 털어 낸다. 깊었으나 깨닫지 못한 겨울밤. 감미로웠으나 꽃샘바람이 삼켜 버린 봄 내음. 짙게 타올랐으나 진부했던 사르비아의 여름 정원. 그리고 고즈넉했으나 허허롭던 늦가을의 고요 숲 어느 것 하나 편치는 않았다. 12월 아픈 귀를 닫고 더러는 아물어 가는 균열의 흔적을 곁눈질하며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끼워 넣는 시간 참아 낸 균열의 마감이다.
여유 고희숙 비가 온다. 사브작 사브작 큰일 마친 편안한 비가! 오늘만큼은 뜨끈한 방바닥 등을 쫙 붙어 다림질하고 싶다. 비가 온다. 똑똑 우산을 건드린다. 이 편한 비가 내리고 나면 가을이란 싸늘함이 밀고 오겠지. 그래도 마냥 좋다. 비가 내린다. 촉촉이 땅이 젖는다. 이 비가 마냥 좋은 건 무엇인가 한적한 마음에 사랑이 깃들기 때문. 쌀쌀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듯 내 사랑이 폭 감싸 안는다.
시 한스푼 고 희 숙 바람결에 그대가 묻어왔다. 여린 들꽃향에도 그대 얼굴이 숨어있고 자유롭게 나는 민들레 홀씨에도 그대 모습이 배어있다. 그대 향하는 내 마음 따라 왔나보다. 마음속에 살랑이는 그리움 한자락에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사랑 한 움큼 넣어 그대에게 보내고픈 열망 시 한스푼으로 곱게 저어야겠다. 그대 사랑으로 녹아 잠들었던 사랑의 숨결 깨어날테니
큰 바위 고희숙무수히 피었던 아버지의 발자국 무지개꽃으로 떠나꺼내 보려 꺼내보려 찾아보지만 점점이 지워져가는 흔적은 허물어져 버린 기억 속에 자리를 잡았네.이슬 한방울이 심장을 되살리듯아직도 당신의 숨결은 잠들지 않고 스치는 바람 한톨도 막아주는 듯한데 따스한 숨결만 남은 빈 둥지에 피울 수 없는 그리움만 바람에 나부끼네. 이제는 그늘이 될 수 없는 당신이지만 무수히 피었던 발자국은기댈 수 있는 산이 되고 칠흙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길이 되어 해맑게 미소 짓고 있네.언제나 텅 빈 가슴을 보듬어주는큰 바위가 되어주신 아버지 당신 떠난 자리에 허허로움만 가득하지만주고가신 사랑은 삶의 등불이 되어내일을 밝히는 스승이시네.
빨간 우체통 고 희 숙갈래머리 두 볼 정원에여드름꽃 피던 시절높은 하늘 넓은 땅 채우고 남는 사랑을 향해 편지를 썼다네.먼지 쌓인 다락방에서홀로 긴 밤의 백열등 태워굳은 손 호호 불며 펜으로 잉크를 녹였지.행여 미소가 잊혀 질 새라 피아노 건반을 흔들듯 쓰고 지우며흰 편지지 위에 철쭉보다 화사한 별빛을 담았네.벽에 걸린 시계추 고개가 흔들린 만큼 쓰고 지워진 화선지가 첩첩이 쌓여아침이 눈 뜰 때 쯤나른한 펜을 놓았네.‘한 사람을 향한 글’남들은 유치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절대 유치하지 않았다네.소녀는 글을 쓰면서 밤새 행복 하였기에갈래머리 두 볼 정원에 철쭉꽃처럼여드름 피어나던 시절의 초상을 빨간 우체통은 기억하고 있을 거야.마지막 입김으로 뽀뽀하고 띠워 보낸젊은 베르테르의 초상 같은 편지와블랙홀에 빠져 답장 없이 사라져간잔잔한 사연들을ㆍ ㆍㆍ
지나보니 마음의 재산 고 희 숙 무엇을 담고 살았을까 까맣게 때가 낀 채 기억의 방에 차곡차곡 쌓여진 조각들 흑인지 백인지 마저도 희미한 빛바랜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본다. 재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소각해 버려야 하는지 봉투마다 이름을 달고 분리해 간다. 시작할 땐 말끔히 치우리라했는데 왠지 마음뿐이다. 이것도 저것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지나보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슬픈 것도 기쁜 것도 마음의 재산 빛은 바랬지만 삶을 고스란히 채워준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이었다.
아궁이의 소중한 추억 고 희 숙 흙내음과 나무향이 부등켜 안고 고향의 냄새로 부르는 그리운 옛집의 소중한 추억 부뚜막에 놓인 그을린 솥단지 정겨움이 묻어나는 정지간 구수한 밥 뜸 내음 노릇노릇 누룽지 맛이 그립다 아궁이에 장작불 지펴 밥 짓고 부지깽이로 남은 숯불 모아 입가에 검댕 묻혀가며 먹던 군고구마와 국자 속 달고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맛이지만 아궁이 속 불씨처럼 꺼지지 않는 잔불로 남아 나의 삶을 조금씩 따뜻하게 익혀가고 있다.
지금이 좋다 고 희 숙 그 전엔 몰랐다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 전엔 안 보였다 봄볕에 흙덩이 밀쳐들고 올라오는 풀 한포기에 담긴 위대함도... 열심히 산 하루의 모퉁이에서 해넘이의 아름다움에 왜 눈물이 나는지도... 그냥 그런 줄만 알았다 중년인 듯 노년인 듯 60고개를 넘어 늦은 듯도 싶고 이른 듯도 싶은 나이... 부모님도 떠나고 아들, 딸 녀석도 제 살길 찾아가니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인 줄... 조금은 보인다. 진한 생명력의 이름 모를 잡초에서... 힘겹게 주운 파지를 리어카에 실고 가는 할머니에게서 지금 어디쯤 와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제의 사소함이 새롭게 다가오고 지나감이 소중함으로 다시 보여 지는 지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삶이 오롯이 익어가는 지금이 좋다.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 고 희 숙 새벽부터 내린 비 대지를 적시고 세상의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씻어내니 씻긴 내 마음에 그리움을 더 합니다 비가 내린 아침 어제의 발자국은 지워졌지만 마음에 각인된 그리움은 그 어떤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유난히 빗소리가 좋음은 세상을 그 만큼 포용해 나가는 것이고 당신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빗길 위에 나만의 발자국을 그려 봅니다
추억은 정지된 인생 고희숙 흐르는 세월 속에 청춘은 멈춰지지 않고 고운 순간은 추억만 남기고 떠나 그리움이 영혼을 헤집어 울릴 때 잔주름 갈피에 서러움만 쌓여간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똑같은 하루를 나눠먹는 시간인데 나의 시간은 어이 이리도 빨리 가나 정지된 영상으로 살아난 어제처럼 오늘도 또 다른 영상으로 재생되어 추억의 창고에 쌓이겠지.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날 한 장 한 장 꺼내어 웃음지어야 겠다.
이름이란 고 희 숙 누군가의 얼굴입니다. 누군가의 여정이 차곡차곡 쌓인 인생입니다. 이름만 생각해도 그 사람이 저절로 떠올려 지는 것은 이름 속에 사소한 기억까지도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열살의 꼬마도 백세의 어르신도 이름만 들으면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스르르 풀려나옵니다. 그 속에 당신의 모든 것이 담겨있으니 참으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똥을 담으면 똥통이 되고 금은보화를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똥을 담는 것도 금은보화를 담는 것도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혼자만의 소중한 이름을 받았기에 한걸음 옮길 때마다 이름을 키워가야 합니다. 오늘도 노을은 아름답게 저물어가지만 내일도 모레도 누군가의 가슴에 아름답게 각인될 이름을 그려 봅니다.
창문 투명한 너를 보면 욕심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것 같아 왠지 부끄럽고 한없이 작아진다. 넌 돌팔매에 부서지고 깨어져도 침묵을 지키는데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힘겨루기 하듯 촉각을 세운다. 길 잃은 폭풍도 따뜻이 안아 넉넉한 햇살의 품으로 돌려보내는데 하나도 둘도 바깥바람으로 돌리며 가슴에 스스로 상처를 준다. 길이 보이지 않는 밤이면 반짝이는 별 그림자로 다리를 놓아 엄마 품속으로 이끄는 넌 낮에도 밤에도 나를 이끄는 등불이다.
겨울나무 고희숙 흰눈은 봄이 아직 멀리 있다 말하지만 나무가 겨울을 참아내는 것은 저만큼 봄이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겨울나무처럼 기다림을 아는 사람은 지난 시간도 지난 세월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또 한번의 시작을 기다릴 뿐...